한 집의 김장이 온 동네 일이 되었던 김장 품앗이의 순서와 지혜

늦가을 어느 집 마당에 배추가 산처럼 쌓이면 이웃들은 굳이 초대를 기다리지 않았다. 한 사람은 절인 배추를 씻고, 한 사람은 무채를 썰고, 또 다른 사람은 커다란 대야의 양념을 뒤집었다. 아이들은 심부름을 하고, 먼저 손이 빈 사람은 다음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은 이 집 김장이지만 며칠 뒤에는 저 집 차례였다.

수십 포기의 배추를 씻고 양념을 버무리는 일은 혼자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김장철에는 사람의 손도 재료처럼 미리 준비해야 했다. 품을 받은 집은 다른 집 김장날 다시 일을 거들었다.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시간과 노동을 빌리고 갚는 방식이었다.

김장 품앗이는 왜 필요했을까

김장은 겨울 동안 먹을 많은 양의 김치를 짧은 기간에 마련하는 일이었다. 배추와 무를 운반하고, 배추를 소금에 절였다가 씻어 물을 빼고, 양념을 만들고, 배춧잎 사이에 속을 넣어 저장 용기에 담아야 했다. 한 단계가 늦어지면 다음 작업도 함께 밀렸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순서를 나눠 맡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일은 아무렇게나 나눈 것이 아니었다. 힘이 필요한 배추 운반과 큰 대야 뒤집기, 칼질이 많은 무채 썰기, 간을 보며 속을 맞추는 일에는 서로 다른 경험이 필요했다. 김장을 오래 해 본 사람은 절인 배추의 줄기를 구부려 보고 소금이 충분히 들었는지 살폈다. 배추가 너무 덜 절면 속을 넣기 어렵고, 지나치게 절면 짜고 힘없이 물러질 수 있었다.

날씨와 배추 크기, 소금의 상태가 매번 같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만 보고 판단할 수도 없었다. 손으로 만져 보고 맛을 보며 다음 단계로 넘어갈 시점을 정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김장 품앗이는 사람 수를 늘리는 것뿐 아니라, 집집마다 쌓인 경험을 한자리에 모으는 방법이기도 했다.

품앗이는 똑같은 김치를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여러 집이 함께 김장을 했다고 해서 모든 집의 김치 맛이 같았던 것은 아니다. 지역과 집안에 따라 젓갈과 고춧가루, 마늘과 생강의 양이 달랐고 해산물이나 갓 같은 부재료를 넣기도 했다. 품앗이 일손은 서로 빌렸지만 마지막 간과 양념의 선택은 각 집의 몫이었다.

그래서 김장날에는 일을 돕는 것과 함께 조리법도 오갔다. 어느 집 젓갈이 깊은 맛을 내는지, 배추의 물을 얼마나 빼야 하는지, 남은 양념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눈으로 보고 배웠다. 따로 적은 조리책이 없어도 손을 보태는 동안 기술이 다음 사람에게 전해졌다.

김장을 모두 마치고 나면 갓 버무린 김치와 삶은 돼지고기 등을 함께 나누어 먹는 풍경도 뒤따랐다. 이 음식은 단순한 보상이 아니라 긴 작업을 함께 끝냈다는 표시였다. 김치 몇 포기를 이웃이나 형편이 어려운 집에 나누는 일까지 포함해 김장은 저장음식을 만드는 날이면서 관계를 확인하는 날이 됐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것은 김치 조리법만이 아니다

유네스코는 2013년 ‘김장, 김치를 만들고 나누는 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올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김치 비법이나 한 가지 표준 조리법이 아니다. 늦가을 공동체가 많은 양의 김치를 함께 만들고 나누며, 그 지식과 경험을 세대 사이에 전하는 문화가 핵심이다.

김장 품앗이도 바로 그 문화의 한 부분이다. 한 집의 겨울 먹거리를 다른 집 사람들이 함께 마련하고, 받은 도움을 다시 노동으로 돌려주는 구조였다. 김치라는 결과물보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협력과 나눔이 기록할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모양이 바뀌었다

오늘날에는 절임배추와 완성 김치를 구입할 수 있고, 소형 가구가 늘면서 김장 양도 줄었다. 아파트 주거와 김치냉장고의 보급은 김치를 만들고 저장하는 장소와 방법도 바꾸었다. 예전처럼 여러 집을 차례로 돌며 며칠씩 일하는 품앗이는 흔하지 않다.

그렇다고 김장 공동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가족이 한집에 모여 일을 나누거나, 마을과 단체가 김치를 담가 이웃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과거의 김장 품앗이가 겨울 식량을 함께 준비하는 일이었다면, 오늘의 공동 김장은 나눔의 의미를 더 크게 드러낸다.

한 집 마당에 쌓였던 배추는 그 집 것만이었지만, 그것을 김치로 만드는 동안에는 여러 집의 손이 섞였다. 김장 품앗이가 남긴 가장 큰 지혜는 많이 담그는 비법이 아니라,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차례를 정해 함께 끝내는 방법이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