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없이 작동했던 한글타자기 원리 : 자음·모음·받침을 한 칸에 찍은 비밀

컴퓨터에서는 ‘ㅎ’, ‘ㅏ’, ‘ㄴ’을 차례로 입력하면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한’이라는 글자를 완성합니다.

그렇다면 전기도 반도체도 없던 기계식 한글타자기는 어떻게 자음·모음·받침을 한 글자 안에 모아 찍을 수 있었을까요?

그 비밀은 한글의 구조를 기계장치로 옮겨 담은 글쇠 배열과 정교한 활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1. 영문 타자기로는 어려웠던 한글의 ‘모아쓰기’ 구조

영문 타자기는 글자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자씩 나란히 찍는 ‘풀어쓰기’ 구조를 가집니다.

그러나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단순히 늘어놓지 않고 음절 단위로 모아 씁니다.

  • 1만 자가 넘는 음절의 벽: ‘한’을 쓰려면 초성 ‘ㅎ’, 중성 ‘ㅏ’, 종성 ‘ㄴ’이 위아래와 좌우의 정해진 위치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현대 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음절은 1만 자가 넘기 때문에, 이 모든 음절을 각각 완성된 활자로 만들어 타자기 안에 넣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 한글의 특징과 구조: 국립국어원 자료에 따르면 한글은 초성·중성·받침의 위치로 구성되는 음절 단위의 조합 문자에 해당합니다. 한글타자기의 개발자들은 이 특징을 해결하기 위해 자음·모음·받침을 각각 작은 활자로 만들고, 필요한 순서대로 타격하여 하나의 음절처럼 보이게 하는 기계적 방식을 고안해 냈습니다.

2. 공병우 세벌식 한글타자기의 작동 원리

수많은 한글타자기 중에서도 가장 혁신적인 평가를 받은 것은 공병우 박사가 개발한 세벌식 한글타자기였습니다.

  • 초성·중성·종성의 분리: 세벌식은 이름 그대로 글쇠를 세 벌로 나눈 방식입니다. 같은 ‘ㄱ’이라도 첫소리로 쓰는 글쇠와 받침으로 쓰는 글쇠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 타격과 활자 막대: ‘한’을 찍을 때는 초성 ‘ㅎ’, 중성 ‘ㅏ’, 받침 ‘ㄴ’을 차례대로 누릅니다. 글쇠를 누르면 연결된 활자 막대가 올라와 리본을 때리고 종이에 글자 모양을 남깁니다. 이때 세 자모를 완전히 같은 지점에 겹친 것이 아니라, 각 활자의 모양과 위치를 다르게 설계해 음절 안의 윗부분, 옆부분, 아랫부분에 각각 들어가도록 조정했습니다.

3. 받침을 정확히 아래에 찍어낸 ‘쌍초점 장치’의 비밀

한글타자기 개발에서 가장 까다로웠던 난제는 바로 ‘받침’이었습니다.

초성과 모음 뒤에 받침을 찍으려면 활자가 음절의 아래쪽으로 정확하게 들어가야 했습니다.

  • 쌍초점 방식의 도입: 공병우 타자기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활자가 모이는 기존 지점 외에 받침을 위한 또 하나의 초점(쌍초점)을 만들었습니다. 받침 활자 막대가 다른 경로를 통해 종이의 아래쪽 위치를 치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 움직글쇠와 안움직글쇠: 초성과 중성에는 입력할 때 캐리지가 다음 칸으로 이동하는 ‘움직글쇠’를 사용했고, 종성에는 캐리지가 바로 이동하지 않는 ‘안움직글쇠’를 배치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자료에서도 공병우 타자기가 초·중성을 움직글쇠에, 종성을 안움직글쇠에 배당하고 별도의 초점을 이용해 받침 활자대를 유도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타자수는 받침을 찍을 때마다 종이를 손으로 되돌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4. 반듯함 대신 속도를 택한 ‘빨랫줄체’와 장인의 손기술

세벌식 타자기로 찍은 글자는 오늘날의 디지털 글꼴처럼 네모반듯하지 않았습니다.

받침이 있는 글자는 아래로 길어지고, 받침이 없는 글자는 짧아 보여 ‘빨랫줄체’라는 독특한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 실용성과 리듬: 공병우 박사는 한글 창제 원리인 초·중·종성 순서를 자판에 그대로 옮겼습니다. 타자수는 글자의 구조를 머리로 그리며 손가락을 움직여야 했고, 활자 막대가 서로 엉키지 않도록 일정한 박자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 수정과 집중력: 지우거나 수정하는 버튼이 없었기 때문에 한 글자를 누르기 전의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습니다. 타자 소리만 들어도 숙련자와 초보자를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손가락의 힘과 리듬감이 중요했습니다.

5. 사라진 기계가 현대 디지털 자판에 남긴 유산

워드프로세서와 컴퓨터의 보급으로 기계식 한글타자기는 사무실과 학교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자음과 모음을 분해하고 조합해 한글을 입력한다는 발상은 오늘날 컴퓨터 키보드와 스마트폰의 두벌식·세벌식 자판에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글을 마치며

가끔 오래된 한글타자기를 마주하면 종이를 둥근 롤러에 끼우고 손잡이를 돌리던 아늑한 풍경이 떠오릅니다.

딸깍거리던 글쇠 소리와 줄이 끝날 때 울리던 작은 종소리, 그리고 철컥하며 캐리지를 밀어 보내던 손길. 그 시절 문장 하나를 고치기 위해 깊은숨을 골랐던 서툰 손의 긴장과 묵직한 울림은, 디지털 화면 속 글자 너머에 여전히 따뜻한 온기로 남아 있습니다.

댓글 남기기